나의 이야기

그것은 사랑일까

페르소나 벗기 2009. 12. 7. 17:55

 

 

사람이 史覽  즉 역사를 보는 존재라고 하거나  인간이 사이존재  (zwishen-wesen) 라고 하듯이 자신의 내면에 골몰할수록 자신의 존재의 이유는 실종된다.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자면,그것은 그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일종일 뿐이다.

그 똑똑한 피폐의 공전 속에서 자의식은  發光하거나 發 狂의 징후까지 보이고.마치 굳은 살처럼 파고들어 세상에 대한 냉소와 자기피폐의 기운은 '자기파괴의 미학적 중동"(벤야민)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게 마련이다.

무릇 근대 이후의 똑똑함을 잃지않으면서도 명랑하고 이드거니 연대하면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 '내면에의 골몰'을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즉 명석하면서도 명랑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은 이론 (삶의 이유)을 세우지 말고 일.하자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살 수 있게 한다.(볼테르) 는 탈형이상학적 메타 계몽적 지혜를 넘어,이론들을 뚫어내며 삶의 양식으로 몸을 끄-을-고 일상의 낮은 자리로 내려앉는 일이다. 이러한 뜻에서도 지식은 늘 양가적이다.

 

--김 영민의 동무론--인문연대의 미래형식-- 중에서

 

삶이 주는 여러가지 불안, 공포,갈등을 무리하게 긍정하지 않으려 한다.

프로이트 말처럼 애초에  신의 계획안에 행복이란 애초에 없었을 거란 말을 믿는다.

내가 살아가야하는 존재의 정당에 대해서도 너무  골머리를 싸매진 않으련 한다.

 

니체의 말처럼 왜 내 삶을 정당화 시켜야 하는가

그저 살아가는 건지 모른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나의 불안, 내게 처한 어려움 어려움 외면하지 않고 힘들더라도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한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고 했다.

긍정이 주는 그 달콤함이 주는 그 가식이 너무 싫었는데, 니체의 말은 가슴에 확 와닿는다.

현실 그대로의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나의 숨결

 

그 숨결을  ,보다 잔잔하게

 

 

명랑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은  혹시 사랑일까